왕부지를 굴복시키지 못 하였으며 계속하여 민족절개를 견지하였다. 왕부지의 “은거생활”은 단순히 소극으로 화를 피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형식의 반청투쟁이었다. 즉 문자를 무기로 하였고 저술과 교학활동을 통하여 사상문화 방면에서 애국정신과 민족사상을 선양하였다. 이는 이후의 광복준비
사상이 시대조류를 이루게 된 18세기 이후의 서울 및 근기 지방 출신의 실학파 학자들을 연구대상으로 한정한다. 실학파의 학자들은 대체로 양반 신분의 소유자이면서 이조 관료국가의 권력체계에서 이탈 또는 소외된 사람들이었으며, 서울 및 근기 지방 출신의 학자들로 주축을 삼고 있다. 이들은 위
역사
1. 한 대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유교는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대박해(大迫害)를 받아 한때 소멸하는 것도 같았으나 한(漢)나라 무제(武帝)에 이르러,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유교는 국가적 교학이 되어 그 지위를 굳혔다. 공자를 존숭하고, 정치계급은 오경(五經:역
《동서문화교류사연구(東西文化交流史硏究)》서평
19세기의 대외관계에 대한 서술들은 중국보다는 서양의 입장이 더 강하게 기록되어 있는 느낌을 준다. 저자는 그렇다면 중국의 입장에서 서방과의 관계를 추적해보면 어떨까하는 의문에서 이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머리말에서 말하
대한 효성, 형제간의 우애, 친구간의 의리, 남녀간의 진실된 사랑 등은 당대사람 뿐만 아니라 현대 사람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기에 충분하다.
문학안에 드리워진 과학적인 요소들을 그들의 시각으로 이해하며 우리는 그들의 삶을 교훈적으로 학습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재지이』는
중국 문화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을 대표한다. ‘문(文)’은 기본적으로 수식성을 띤 문장을 뜻한다. 그 후 의미가 확대되어 사상, 도덕, 신념, 문화에서의 영향력을 뜻하기도 했다. 유가적인 교육을 받은 학자들은 ‘문’을 칭송하고 흔히 군사적인 질서를 뜻하는 ‘무(武)를 경멸하는 경향을 보여왔다.
대한 미개척분야에 대한 기초조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또다른 문제는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지식에 대한 문제다. 불교가 중국인의 생활․사상의 모든 면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때, 과연 모두 같은 방법으로 또한 동등한 정도로 그들에게 영향을 미쳤을까? 분명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상은 그들의 지식과 비판의식에 커다란 지침서가 된다. 이들 사상가들의 편견에 가까운 유토피아적인 모델로서 동양 정치, 사상을 생각하게 한 원인이다. 동양에 대한 지식이라든가 경험이 가장 풍부했던 것이 예수회파 교인들이었다. 이들은 자국의 보수주의 정치가를 공략하기 위하여 그 도구로
사상가들 중에 나중에 주희에 의해 집대성되는 주자학 계열에 서는 사람들로서 북송에 활동했던 유력선 다섯 사람이 있다. 이들은 ‘북송의 다섯 선생’이라 하며 주돈이, 장재, 소옹, 정이, 정호이다. 이들이 살았던 시대는 당나라와 연결되는 시기이다. 역사적으로 당에서 송으로의 변혁기는 사회 각
민족주의와, 일본의 本居宣長의 민족주의는 서로 같고 다른 점이 있다고 하겠다. 이들의 기철학과 민족주의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에 동아시아 전통사상을 스스로 혁신해 근대사상을 이룩하려고 노력한 성과이다. 역사의 필연적인 전환은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중세의 이상주의를 극복한 기철학